<죽은 이들의 뼈 위로 쟁기를 끌어라>를 읽고
행운처럼 그녀의 글이 나에게 왔다. 워낙 로맨스를 질색하고 뒷머리를 강타하는 스릴러물을 사랑하는 취향인지라 제목과 그림만 보고 정말 아무 생각없이 선택한 책이었다. 올가 토카르추크의 장편스릴러 소설인 이 책은 그 스토리도 흥미로웠지만, 작가가 등장인물을 통해 말하고 있는, 그녀의 엄청나게 깊고 넒은 사유의 그릇에 나는 흠뻑 빠지고 동화되었다.
주인공 두셰이코의 묘사는 매우 자세하고 섬세했다. 마치 인물사진을 보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사진이나 그림이 대상의 외면을 시각화하였다면 내가 본 사진은 내면의 형상이었다. 여러 어두운 군상 속에서 별처럼 빛을 내고 있는 그녀의 영혼은 다수의 일상에서는 매우 아프고 불안정해 보였지만 그 내면의 이야기는 우매한 내가 미쳐 느끼지 못한 깨달음의 소리와 같았다.
이따금 우리가 수많은 사람들과 함께 머무는, 거대하고 넒은 무덤 속에 사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나는 차갑고 불쾌한 잿빛 어스름에 물든 세상을 보았다. 어쩌면 감옥은 바깥이 아니라 우리 각자의 내면에 존재하는게 아닐까. 어느 틈엔가 우리는 감옥 없이는 살 수 없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p52)
가까운 사람들조차 고통스러워하는 나를 이해하지 못했다. 아프다고 외쳐보았는데 그들에게 나는 이상한 사람이다. 그들과의 관계가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한 때는 숨이 막히고 자꾸만 방어태세를 갖추며 예민해져가는 내가 스스로도 정신적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다. 나는 이곳이 무덤 같은데 모두들 의문을 눈빛으로 괜찮다며 그냥 머물라고 했다. 끝없는 비교와 경쟁, 그러한 행위에서 느껴지는 상실감이 나를 가두고 끝없는 고통을 만들었다. 기분전환을 위해 찾는 미디어가 오히려 독이 되었다. 지적인 욕구를 채워 주지 못하는 인터넷, 소셜미디어, TV 등이 나에게는 요란한 감정의 쓰레기더미처럼 느껴졌다. 울려오는 전화벨이 두려워서 일부러 가방에 넣고 꺼내지 않았다. 나는 본능적으로 살아남기 위해 그나마 더 자연과 가까워져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두셰이코처럼. 나이가 들고 몸과 정신이 성치 못하다는 것을 절실히 느낄 때부터 '돌아가야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도시에서 나고 자란 사람인데 왜 이런 기분이 드는 걸까. 아이들이 있어서 마냥 자유롭지 않기에 균형을 맞추어야만 하는데, 그들만 아니였다면 정말 깊은 숲 속의 암자로 가서 스스로를 치유할 계획을 세웠을지도 모른다.
나는 고통이 빚어낸 유령이다. 어떻게 하면 좋을지 막막할 때마다 나는 목에서 사타구니까지 번쩍이는 지퍼를 채우고 있다가, 그것을 위에서부터 아래로 천천히 내리는 상상을 해본다. 그리고 팔에서 팔을 빼고, 다리에서 다리를 빼내고, 머리에서 머리를 떼어낸다. 내 몸에서 몸을 빼내자, 그 거죽이 마치 낡은 옷처럼 내게서 흘러내린다. 그 안에 담겨있던 나는 훨씬 더 연약하고 섬세하며 거의 투명하다. 나는 해파리처럼 희뿌연 우윳빛의 형광색 몸을 갖고 있다. 이것이 내가 나를 안도하게 만드는 유일한 환상이다. 그렇다, 그 순간 나는 자유롭다. (p98)
가끔씩 홀로 죽음을 상상할 때 깨어진 육신 사이로 스믈스믈 흘러나오는 진정한 내가 어디로 가게 되는 것일까 고민해 본적이 많다. 결국 나는 죽음을 맞이할 텐데 특별한 종교도 없는 나는 죽음의 문 앞에서 누구를 찾게 될까. 두셰이코의 이론을 들었으니, 나는 아마 아주 작은 별로써 우주의 원리에 따라 부숴지고 소멸되어 다시 전체의 균형을 맞추리라 생각한다. 세상은 거대한 그물이고 하나의 전체이기에 모든 것은 우주의 연결망을 통해 함께 묶여있고 함께 작동한다는 그녀(주인공 두셰이코)의 믿음이 꽤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했다.
세상은 거대한 그물이며, 그 어떤 사물도 개별적으로 존재할 수 없는, 하나의 전체라는 사실을 이해해야 한다. 세상의 미세한 조각들은 평범한 사고방식으로는 꿰뚫기 어려운, 복잡한 연결망의 우주에 의해 나머지 다른 조각들과 견고하게 묶여있다. 그렇게 세상은 작동한다. (p.87)
결국 우리가 저지른 행위는 미세하게 진동하는 광자(光子)에너지로 바뀌어 마치 영화에서처럼 우주를 뻗어 나갈 것이며, 다른 행성들은 세상의 종말까지 그것을 지켜볼 것이다.(p67)
나에게는 점성학을 기반으로 한 그녀의 말들이 어떤 종교보다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나의 영혼에는 어떤 우주의 코드가 각인되어 있을까.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이 원인 모르는 끝이 없는 불안감과 상실감은 내가 태어날 때 어떤 행성들의 배열 덕분일까. 내가 손톱을 피가 날 때까지 물어뜯는 버릇을 평생 고치지 못할 것은 이미 정해져 있는 일인지도 모른다.
나는 우리가 세상 사람들이 쓸모없다고 여기는 그런 부류의 사람들임을 깨달았다. 본질적이고 생산적인 일을 하는 것도 아니고 중요한 아이디어도 내놓지 않으며, 필요한 물건이나 식량을 만들어 내지도 않고, 땅을 경작하지도 않고, 경제활성화에 보탬에 되지도 않는다. (...) 하지만 왜 우리는 꼭 유용한 존재여야만 하는가, 대체 누군가에게, 또 무엇에 유용해야 하는가? 세상을 쓸모있는 것과 쓸모없는 것으로 나누는 것은 과연 누구의 생각이며, 대체 무슨 권리로 그렇게 하는가? 엉겅퀴에게는 생명권이 없는가? 창고의 곡식을 훔쳐먹는 쥐는 또 어떤가? 꿀벌과 말벌, 잡초와 장미는? 무엇이 더 낫고 더 못한지 과연 이성적으로 판단할 수 있을까? 구멍이 많고 휘어진 거목은 사람에게 베이지 않고 수세기 동안 살아남는다. 왜냐하면 그 나무로는 어떤 것도 만들어 낼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본보기는 우리와 같은 사람들에게 용기를 준다. 유용한 것으로부터 얻어 낼 수 있는 이익은 누구나 알지만, 쓸모없는 것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이익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p340)
나는 내가 생각하는 유용한 무언가가 되기 위해 늘 애써왔다. 스스로 틀을 맞추고 거기에 맞추어 지면 기뻐했고, 맞추지 못하면 좌절했다. 그래도 꽤 잘 맞추어 낸 내가 대단하다고 생각해왔는데 막상 결혼을 하고 10년 이상 육아에 몰입하자 아무것도 못하는 내가 참 쓸모없고 무능력하다고 생각했다. 주위 사람들을 원망하고 나의 인생이 누군가를 위해 소비된다고 믿었다. 하지만 자라난 아이들을 통해 나는 또 하나의 문을 열었다. 오랜 수행과 같았던 육아의 고통을 통해 나의 편협한 시각은 확장되었고 순수함과 같이 까맣게 잊고 있었던 감정들이 되살아났다. 그렇다면 나의 인생의 전반기와 중반기 중 과연 어느 것이 더 가치있는 것을 이뤘는가? 절대로 판단 할 수 없다. 고통을 통해 진실을 얻은 기분이다. 나는 두 개의 우주로 통하는 문을 열었고 그들이 얼마나 아름다운 빛을 내는지 지켜 볼 수 있는 영광을 얻었다. 그들이 이 어지러운 세상에서 '훌륭'해지거나 '유명'해지기 보다는 스스로를 잘 가꾸어 단단하고 은은한 빛을 내는 별이 되었으면 좋겠다.
인간의 정신은 우리가 진실을 보는 것을 막기 위해 발달한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우리로 하여금 그 매커니즘을 직시하지 못하게하기 위해 말이다. 정신은 우리 주변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우리가 절대 이해하지 못하게 만들어 주는 방어체계이다. 우리 뇌의 용량이 어마어마하다지만, 정신의 주된 임무는 정보를 걸러내는 것이다. 지식의 무게를 모조리 짊어지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세상의 모든 입자는 고통으로 이루어져 있으므로.(p310)
내 삶에서 고통은 내면에 집중하고 인식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것 같다. 죽음과 고통을 마주하는 것 만큼 자신을 되돌아보고 인식을 재정비할 수 있는 효과적인 방법은 없었다.
“욕심, 자연을 존중할 줄 모르는 태도, 이기주의, 상상력의 결핍, 끝없는 분쟁, 책임 의식의 부재가 세상을 분열시켰고, 함부로 남용했고, 파괴했다. (...) 세상이 죽어가고 있는데, 우리는 심지어 알아차리지도 못하고 있다.”(p389)
이 책에는 채식주의, 생태주의, 동물권 수호 등 올가 토카르추크의 신념과 가치관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그녀는 이 세상은 “살아 움직이는 거대한 단일체”이고, 인간은 “작지만 강력한 그 단일체의 일부”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생태계에서 인간와 자연은 서로 동등한 존재 가치를 지니고 있으며, 상호 의존적인 공생관계에 있다는 사실을 토카르추크는 늘 강조한다고 한다. 글을 읽는 내내 책 안쪽 페이지의 작가이력, 올가 토카르추크의 사진을 몇 번이고 들여다보았는지 모른다. 그녀는 어떻게 이러한 글을 쓸 수 있을까. 그녀는 얼마나 많은 지식을 탐구했고 얼마나 다양한 경험과 사색을 하였길래 그 깊이와 넓이를 가늠조차 할 수 없는 글을 쓸 수 있을까. 그녀의 글은 수술용 칼처럼 매우 날카롭고 자세하고 동시에 시처럼 추상적이게도 느껴져 마치 오로라 같았다. 그 아름다운 빛과 색에 취해있으면서도 동시에 우리가 진정 우주에 한 작은 미물로 존재하고 있구나, 자연의 일부이구나 깨닫게 되는, 마음이 저절로 경건해지고 겸손해지는 그런 느낌말이다. 나는 오로라를 직접 본 적은 없지만 아마 이 책을 읽고 난 후 드는 감정과 비슷하지 않을까 상상해본다.
이 책을 만난 것을 감사한다.
봄은 단지 짧은 막간일 뿐이고, 그 뒤에는 강력한 죽음의 군대가 도사리고 있다. 그들은 이미 도시의 성벽을 포위하고 있다. 인생의 한순간을 잘개 쪼개어 자세히 들여다보면 공포에 질려 숨이 막혀버릴지 모른다. 몸 안에서 끊임없는 분열이 일어나면서 우리는 머지않아 병을 앓고, 죽을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우리를 떠날 것이며, 그들에 대한 기억은 극심한 혼란 속에서 점점 사라질 것이고 결국 옷 장 속의 옷 몇 벌, 이미 알아볼 수 없게 된 누군가의 사진들만 남을 것이다. 그렇게 가장 소중한 추억은 흩어져버리고 모든 것이 어둠 속으로 가라앉고 자취를 감추겠지. (P1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