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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inking

<월든>을 읽으면서

by 봉그림 2022. 9. 14.

<월든>, 헨리 데이비드 소로 지음

 

초월주의 철학자이자 자연과학자인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월든>. 이상하게도 여간 읽어나가기가 쉽지 않은 책이었다. 그래서 여전히 다 읽지 못했다. 물욕과 인습의 체제에 반하고 자연주의적인 삶을 살기 위해 월든 호숫가에 집을 짓고 자급자족하며 살아가는 데이비드 소로의 생활들 그리고 그의 깊이 있는 사상들이 담겨있다. 조용하고 한적한 어느 산사에서 집중하여 쭉 읽고 싶은 글인데 현실에서는 아이들의 웃음소리, 울음소리, 재잘거림 때문인지 당췌 내용이 흡수가 안된다. 몇 번이고 시도하다 그냥 천천히 읽기로 결심한 책이다.

 

경제

대부분의 사람은 집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제대로 생각해본 적이 없는 것 같다. 그저 이웃들이 집이 있으니 나도 집이 있어야하지 않나 싶은 생각에 굳이 가난하게 살아도 되지 않는데도 평생을 가난에 발목이 잡혀 살아간다. 재단사가 손수 만든 외투라면 가리지 않고 받아 입으면서도, 평소 종려나무 잎이나 우드척 가죽으로 만든 모자는 벗어던지고 왕관이 살 돈이 없어서 힘들다고 죽는 소리를 하는 사람들과 마찬가지 아닌가! 지금보다 더 호화롭고 편리한 집을 짓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겠지만, 그런 집을 지을 여력이 없다는사실도 우리 모두 인정해야 한다. 왜 지금보다 더 많은 것을 얻기 위한 노력만 하고, 덜 가진 것에 만족하는 법은 배우려고 하지 않는가? 어찌하여 존경받는 시민은 사뭇진지한 태도로 여분의 장화와 우산을 마련하고, 언제올지 모를 손님을 위해 방을 충분히 마련해두어야 한다고 가르치는가?(p50)

 

 이 단락에서는 자신에게 주어진 안락함에 만족하지 못하고 더 나은 문명인이 되기 위해 스스로를 가난의 덫에 가두는 현대인들의 모습을 안타깝게 바라보고 있다. 특히 사치와 방탕함에 빠져있는 소위, 유행을 만들어내는 사람과 그를 따르려고 안간힘을 쓰는 수많은 우매한 사람들에게 깨달음을 주려고 한다. 이 책이 쓰인 시기는 19세기로 대략 200년이 지난 후인데 그 당시나 지금이나 우리가 원하는 근본적인 욕망들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오히려 미디어의 영향으로 유행을 종교처럼 숭배하고 열광하는 사람들이 늘어난 것을 보면 이것은 어쩌면 일종의 정신과적인 전염병이 아닌가라는 생각까지 든다. 자연에 대해 감사하고 순응하는 풍족한 원주민보다 가난을 자처하고 평생을 비교에 찌든 문명인으로 살게 된 우리가 과연, 그들보다 훨씬 월등하다고 믿는가? 둘 사이를 가르는 것은 문명인이 상대적으로 많은 경험과 학습을 했다는 것 뿐이었다. 유한한 개인의 삶에서 긍정적인 감정을 놓고 잣대를 들이대면 과연 문명인이 훨씬 만족스러운 삶을 살았다고 말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든다. 일시적이고 덧없는 것에 마음을 쓰지 말자. 봄을 맞이하는 자연의 모습으로 단순하고 건강하게, 이유없는 불안감은 내려놓고 내 삶의 진정한 가치를 찾고 향기를 내자고 다짐한다.

 

 

 

나는 어디서, 무엇을 위해 살았는가

왜 우리는 이렇게 분주히 삶을 허비하며 살아가야 하는가? 배가 고프기도 전에 배를 곯아 죽겠다고 결심이라도 한 것 같다. 우리는 제대로 바느질을 한 땀 해 놓으면 나중에 아홉 번의 수고를 덜어낼 수 있다고 말하면서도 내일 아홉 번 바느질 하는 수고를 덜기 위해서 천 번의 바느질을 하느라 여념이 없다. 다들 일 때문에 바쁘다고 하는데, 정작 중요한 일은 하나도 없다. 무도병에 걸려서 머리를 가만히 쉬지 못하게 하는 것 같다.(p129)

너무 서두르지 않으며 여유를 가지고 지혜롭게 산다면, 위대하고 가치 있는 것만이 영원하고 절대적인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고 사소한 두려움과 소소한 쾌락은 그저 현실의 그림자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바로 이러한 삶은 우리의 기운을 북돋우는 숭고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두 눈을 감고 잠에 취해있거나 겉모습에 쉽게 현혹당하며, 판에 박힌 일상과 관습 속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이는 껍데기뿐인 환상에 불과하다. 아이들은 삶을 하나의 놀이로 보기 때문에 오히려 어른보다 인생의 참된 법칙과 관계를 명확히 분간한다. 어른들은 삶을 가치있게 살지도 못하면서 그동안 쌓아온 경험 때문에, 그러니까 실패를 통해 뭔가 터득했다고 믿으면서 아이보다 현명하다고 자부한다.(p133)

 

 놀이터에서 작은 아이가 뛰다가 넘어져 피가 나는 무릎을 부여잡고 찾은 곳은 바로 내 품 안이다. 그대로 곧장 뛰어와 엉엉 눈물을 흘린다. 나는 내 온 정성을 다해 그를 포근히 껴안고 등을 쓰다듬어주며 괜찮다고 말해준다. 든든한 첫째 아이도 와서 괜찮냐며 상처를 같이 들여다 봐준다. 귀여운 나의 꼬맹이는 금새 눈물을 멈추었고 우리 셋은 손을 꼭 잡고 집으로 돌아온다.

 어른이 되니 크게 넘어져 일어날 수가 없는데 파고들어 위로를 받을 품이 없다. 나보다 작아진 부모님께는 차마 보이고 싶지 않은 모습이다. 나의 동업자는 무도병에 걸렸는지 너무 바빠서 언제나 멀리에서, 내가 넘어졌는지조차 알아차리지 못한다. 피가 철철 나고 있는 내 상처를 유심히 바라봐주고 따뜻한 말 한마디가 듣고 싶었는데 누구에게든 공감을 받기가 쉽지 않다. 그도 그럴 것이 무엇이 그렇게 불안하고 참을 수 없는지 나 스스로도 명확하게 설명 할 수 없다. 난생 처음 느껴보는 매우 복잡한 감정이다. 절대적으로 가치있는 일을 하고 있다고 위안을 얻으면서도 어느 순간 이것은 나의 삶이 아니기에 잘근잘근 부숴버리고 싶어진다. 가장 편안하면서도 절대 나갈 수 없을까봐 너무너무 두렵다. 좁은 사육장에서 오랜 시간 곤충젤리만 받아먹다가 알을 한움큼 낳고는 배를 뒤집어깐채 죽은 암컷 딱정벌레가 나와 비슷하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어디에서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가. 책을 읽고 글을 쓰는 독후활동은 나에게 언제나 질문을 던지고 깨워준다. 잠시 눈과 귀를 막고 고요함을 찾아 내 안의 세계에 집중하면 비로소 내게 주어진 시간의 시냇물이 보이고, 그 안에서 내가 무엇을 찾고 있는지 제법 명확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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